대종교는 구한말 엘리트 계층들을 잇는 보이지 않는 끈이었다. 대종교는 열강들의 각축장으로 변해버린 한반도에서 조선의 주권과 독립을 열망하는 지식인들을 민족정신으로 잇게 한 사상적 토대이자 실천적 기반이었다. 무오독립선언 초안 마련, 북로군정서·광복군 등 무장 독립운동, 상하이 임시정부 참여, 민족학교 설립, 민족사학의 정립, 한글지키기운동, 해방 후 건국운동에 이르기까지 현실참여에 적극적이었던 대종교인들의 화려한 면면.

대종교의 인물들은 대종교의 중광(重光·다시 일으켜 세움) 전과 후를 나누어 살펴야 한다. 조선조 홍만종은 《순오지(旬五志)》에서 신교(神敎·대종교)와 연관된 인맥의 흐름을 단군·혁거세·주몽· 술랑·영랑·안상· 남랑· 옥보고·김렴효· 소하대로·산시· 김가기· 최치원·강감찬· 권진인·김시습· 홍유손·정붕· 정수곤·정희량 등 수십명을 열거했다.

이렇듯 중광 이전 단군신앙과 관계된 인물들도 적지 않지만 이들에 대한 고찰은 대종교의 역사가 아직 체계화되지 못해 쉽지 않다. 종교적 방면에서 대종교의 인물들을 꼽으라면 홍암(弘巖) 나철(羅喆) 대종사와 무원·백포·단애(檀崖) 3종사(宗師)를 내세울 수 있다. 왜냐하면 대종교는 중광 이래 지금까지 이들에 의해 엮인 종리(倧理)·종사(倧史)·교단조직·종무행정 등의 영향을 절대적으로 받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대종교의 중광교조(重光敎祖)인 홍암 대종사는 대종교신앙을 현대적으로 부활시킨 한국 종교사의 큰 스승이다. 그는 구한말 장원급제했던 당대의 엘리트로 지(智)·덕(德)·용(勇)을 겸비한 우국지사요, 사상가였다.

그에 의해 주도된 을사5적 주살(誅殺)사건이 궁극적인 실패로 돌아가자 그는 나라는 망했어도 민족은 존재한다는 인식 아래 민족정신의 부활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된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1909년 우리 민족 정신사에서 중차대한 선언이라 할 수 있는 대종교 중광을 선포한 것이다. 이를 통해 과거 퇴색하고 짓밟힌 종교·사상·문화를 재건하고 연결해야 한다는 종교사상적 명분과 빼앗긴 주권 아래 몰락한 조국을 되찾아야 한다는 주권적 명분을 동시에 세우게 된다.


그는 또 “신리대전”(神理大全)을 저술하여 단군신앙의 사상적 틀이라 할 수 있는 삼신일체사상을 철학적으로 구명했다. 또 “중광가”(重光歌)나 “밀유”(密諭)에 나타나는 그의 종교적인 신묘한 통찰과 순수한 정신주의, 나아가 인류를 하나로 끌어안는 홍익주의적 가치는 실로 홍암사상의 위대함을 한눈에 보여주는 내용들이다. 더욱이 “삼일신고”(三一神誥) ‘진리훈’(眞理訓)의 3법(三法)에 나타나는 조식법(調息法)을 통한 폐기사망(閉氣死亡)은 홍암 개인적으로 볼 때는 최고의 수행경지를 나타낸 것이요, 사회적으로는 민족사회의 각성의 계기가 된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대종교 중광 2세 교주를 지낸 무원 김교헌(金敎獻) 종사는 만주를 중심으로 한 교세 확장과 함께 대종교의 전성기를 일궈냈다. 특히 대종교 교사의 시금석을 마련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다. 그 또한 구한말의 석학으로 1909년 규장각 부제학으로 국조보감(國祖寶鑑) 감인위원(監仁委員)을 역임한 국학의 권위자였다. 그는 1910년 대종교에 입교하고 만주로 망명해 활발한 포교활동을 전개하던 중 1916년 홍암 대종사가 순교하자 교통(敎統)을 전수받고 대종교 발전을 위한 다각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종경회(倧經會)를 구성하여 교적(敎籍)의 인쇄·간행을 활성화했고 이를 바탕으로 포교활동 및 교세 확장을 도모했다. 이러한 노력에 힘입어 1922∼23년 총 46개소의 시교당을 설치하게 된다. 즉 만주지역 34개소, 국내 6개소, 노령지역 3개소, 중국 본토 3개소를 거느리게 된 것이다.

그는 또 1918년 재외 독립운동 지도자들을 결집해 ‘대한독립선언서’(일명 무오독립선언서)를 발표한다. 이 선언은 일제에 대한 무장혈전주의 선언으로, 후일 도쿄(東京)유학생들에 의해 발표된 ‘2·8독립선언서’와 ‘3·1독립선언서’의 기폭제가 되었다. 특기할 만한 것은 여기에 서명한 39인 가운데 몇명을 제외한 모든 인물이 대종교인이었다는 점이다.

한편 김교헌 종사는 “신단민사”(神檀民史)와 “신단실기”(神檀實記) 그리고 “배달족역사”(倍達族歷史)를 저술해 신교(大倧敎)의 역사를 체계화하고 민족사관의 정신적 에너지를 제공한다. “신단실기”의 특징은 한국사를 배달족(檀君族)이라는 단일민족으로 체계화하고 요(遼)·금(金)까지 한국사의 범주에 포함한 대종교적 역사상을 정립하면서 반도적 역사인식을 대륙으로 넓혔다는 데 있다. “신단민사”는 통사 체계의 구성을 목적으로 한 교과서용 편찬으로 이 책에서도 역시 대륙사관의 일관성을 드러낸다. 때문에 “신단민사”는 대종교뿐만 아니라 당시 항일 독립군을 양성했던 사관학교 학생들에게도 국사 교재로 널리 사용되어 대종교 정신을 바탕으로 한 항일정신을 일깨우기도 했다.

“배달족역사” 또한 “신단민사”와 비슷한 통사체계의 구성으로, 상하이(上海) 임시정부에서 간행하여 국사교과서로 사용하면서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데 지대한 역할을 한다.

대종교의 종교적 인물을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백포 서일(徐一) 종사를 꼽을 수 있다. 백포 종사는 함경북도 경원 태생으로 경술국치 후 동만(東滿)으로 망명하여 대종교에 입교하면서 교리 연구와 독립운동에 본격적으로 헌신한 인물이다. 우선 만주지방에서의 본격적인 항일투쟁이 서일이 조직한 중광단(重光團)의 출현과 함께 본격화한 것을 주목할 수 있다.

중광단은 대종교도들로 뭉쳐진 만주 최초의 항일독립운동 단체로서 ‘중광’의 명칭 또한 민족 고유사상의 부활 구현을 목표로 하는 대종교의 을유(己酉·1909)년 중광에서 그 뜻을 취했다.

후일 이 중광단은 정의단(正義團)으로 확대, 개편되고 나아가 북로군정서로 발전한다. 서일은 뭇동지들의 추대로 북로군정서의 총재로 취임하여 대종교 정신에 입각한 사관 연성소를 설립하고 이들을 주축으로 독립운동사의 금자탑이라 할 수 있는 청산리 독립전쟁의 승리를 일구어냈다. 백포는 독립군을 지휘·통솔하는 와중에서도 언제나 단주(檀珠)를 목에 걸고 수도생활과 대종교의 종리탐구(倧理探究)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러한 배경에서 백포는 무장독립투쟁의 지도자로서 뿐만 아니라 한국 종교철학사에도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다. 그는 한학과 역리(易理)에 능통하고 불서(佛書)와 신학(神學)에도 조예가 깊었다. 독립투쟁의 어려움 속에서도 착실한 수행과 연구를 통해 “회삼경”(會三經) “삼일신고도해강의”(三一神誥圖解講義) “신리주해”(神理註解)“종지강연”(宗旨講演) “삼문일답”(三問一答) 등 실로 기적에 가까운 연구업적을 이룩했다.

“회삼경”은 분삼합일(分三合一)의 종리(倧理)를 36종의 묘화대법(妙化大法)으로 귀일하게 한 심오한 경전으로 중광교조 홍암 대종사의 “신리대전”과 쌍벽을 이루는 글로 평가된다. “삼일신고도해강의”는 하느님 교화의 큰 가르침을 신인일리(神人一理)의 경지에서 우주관·내세관·인생관 등을 종교철학적 측면에서 궁구한 것이며 “신리주해”는 삼신(三神)·삼종(三宗)의 동의(同義)와 회삼귀일(會三歸一)의 화행묘법(化行妙法)을 명시하였다.

한편 “종지강연”은 인생의 본능·자유·행복 등을 현대철학사조에 비추어 실천적 측면을 강조한 것이고 특히 백포의 “구변도설·진리도설”(九變圖說·眞理圖說)은 천·지·인(天地人) 3극(三極)의 원리를 생·화·성(生化成)의 변칙에 의하여 가달(妄)을 돌이켜 참(眞)으로 돌아가는 이치로 명쾌히 밝힌 철리도(哲理圖)이다.
끝으로 대종교의 3세 교주를 지낸 단애 윤세복(尹世復) 종사는 1910년 12월 홍암 대종사와의 짧은 만남에서 큰 감명을 받고, 홍암으로부터 세린(世麟)이라는 본명을 세복으로 개명받음과 함께 단애(檀崖)라는 새로운 호(號)도 받았다. 그 뒤 시교사(施敎師) 자격으로 만주 환런(桓仁)현으로 건너가 동창학교를 설립하고 대종교 정신을 토대로 한 민족교육을 시작한다. 대종교 중광 이후 세 교주 가운데 1924년 교주를 맡아 1950년 4월29일 제7회 교의회를 통해 총전교제로 바뀌기까지 30년 가까이 교주로 재임했다. 그는 24년 3세 교주를 맡으면서 제2회 교의회를 소집하여 홍범규제의 개규(改規)를 통하여 새로운 대종교의 중흥을 도모했다.

그러나 1925년 삼시협약(三矢協約)의 부대조항(附帶條項)으로 인하여 대종교는 일대위기를 맞게 된다. 그 부대조항에 “대종교 주요 간부인 서일이 대한독립군의 수령으로서 그 교도들을 이끌고 일본에 항전하였으니 대종교는 곧 반동군단의 단체로서 종교를 가장한 항일단체이니 중국에서 영토책임상 이를 해산시켜야 한다”는 내용에 의해 대종교 포교금지령이 내려지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대종교의 중심인물로서 대중국 외교통이었던 박찬익의 활약으로 1929년 포교금지가 풀렸지만 1931년 만주사변으로 또다시 활동이 금지되었다. 이러한 어려운 외적 상황에도 불구하고 단애종사는 1934년 대종교선도회를 조직하여 포교와 항일활동을 계속하면서 1939년에는 대종교 교적간행위원회를 발족하여 2만권 가까운 교적을 간행했다.

그의 이러한 불굴의 활동에 힘입어 대종교의 교세가 식기는커녕 더욱 확산되자 일제는 항일독립운동의 정신적 본산을 대종교로 규정하고 이극로의 ‘널리 펴는 말’을 트집잡아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과 때를 같이해 단애종사를 비롯한 대종교 간부 25명을 국내와 만주·중국에서 동시에 검거하니 이것이 대종교의 임오교변(壬午敎變)이다. 임오교변이야말로 일제하 종교박해의 최대 사건이요 현대 한국정신사에 일대 각성을 던져준 사건이었다.

윤세복은 일제에 검거되어 감옥생활을 하면서도 대종교의 교리를 몸소 실천하여 증명한 수행자이기도 했다. 일제의 혹독한 고문을 받으면서도 대종교의 경전인 “삼일신고” 진리훈에 나타나는 3법수행(三法修行)의 묘법을 몸소 체득하여 “삼법회통”(三法會通)이라는 묘리(妙理)로 체계화한 것이다. 이 “삼법회통”은 지금도 수행·구도를 공부하려는 많은 후학들에게 좋은 귀감으로 회자된다.



대종교의 중광은 한국학의 중흥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치면서 그 방면의 걸출한 인물들을 등장시킨다. 그 대표적 분야가 국사와 국어부문을 들 수 있다.

우선 국사 분야를 본다면 한마디로 대종교의 중광과 함께 한국 민족주의사학이 체계화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난날 불교중심적 사관이나 존화주의를 바탕으로 한 유교중심적 사관에 유린당하던 도가적(道家的) 민족주의사관이 대종교의 중광과 더불어 체계화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대종교가 중광한 시기인 1910년대 한국사 서술에서 그것을 주도한 대부분의 인물이 대종교도였으며 설사 대종교도가 아닌 역사가라고 하더라도 직·간접적으로 대종교의 영향을 받지 않은 경우는 드물었다.

대종교도로서 언급할 수 있는 대표적 민족주의 사학자들을 꼽는다면김교헌· 신채호(申采浩)· 박은식(朴殷植)· 이상룡(李相龍)· 유인식· 정인보(鄭寅普)· 안재홍·장도빈(張道斌) 등이다. 우선 한국 민족주의 사학의 양대산맥으로 불리는 단재 신채호와 백암 박은식을 중점적으로 살펴본다.

신채호는 1908년 “독사신론”(讀史新論)을 발표하여 근대사학 확립이라는 명예를 안은 인물이다. “독사신론”이 비록 미완성 작품이지만 단군시대부터 발해시대까지의 근대 민족주의사학의 기본 골격을 명쾌하게 제시하여 우리나라 근대사학의 새로운 장을 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채호는 이러한 역사인식과 달리 사상적인 면에서는 유교적 입장을 벗어나지 못했다. 즉, 1910년 대종교를 경험하기 이전에는 그의 사학정신의 핵이라 할 수 있는 낭가사상(郎家思想)과 일맥하는 선교(仙敎)에 상당히 부정적인 자세를 보여준다.
그는 선(仙)을 불로장수를 추구하는 중국 도교의 이입으로 생각해 무가치한 종교로 평가했던 것이다. 그러나 대종교를 경험한 이후에는 중국 도교와 전혀 성격이 다른 우리 민족 고유의 선교가 이미 존재해 민족신앙의 중요한 줄기를 형성하고 있음을 인식하게 된다. 결국 1910년 이후 신채호의 역사연구는 거의 대부분을 선교의 실체를 연구하는 데 바쳤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1910년 3월에 발표된 “동국고대선교고”(東國古代仙敎考)는 박은식의 “몽배금태조”(夢拜金太祖)에 비견할 만큼 신채호의 의식변화를 보여주는 작품으로 과거 유교정신의 잔재를 청산하고 낭가사상이라는 역사정신의 틀을 마련하는 계기가 됐다. 신채호가 보다 직접적으로 대종교와 연관을 맺는 것은 1911년 해삼멸(海蔘威)에서 광복회 부회장을 맡으면서 본격화된다. 당시 광복회의 회장직은 신채호를 동삼성으로 초청하여 많은 후원을 한 것으로 알려진 윤세복이었다.

1913년 신채호는 당시 대종교의 중심인물로서 상하이에서 대종교 포교활동과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예관 신규식의 초청에 의해 상하이로 간다. 그곳에서 신규식·박은식과 더불어 대종교의 종립학교인 박달학원을 설립해 청년들에게 한국사를 강의했다. 나아가 그는 1914년 윤세복의 초청으로 다시 펑텐(奉天)성 회인현으로 옮겨가 대종교에 입교함과 동시에 대종교의 종립학교였던 동창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조선사”를 집필했다고 하나 아쉽게도 전하지는 않는다.

이러한 대종교의 영향 속에서 신채호는 낭가와 낭가사상의 독자성과 주체성을 더욱 강조해 가면서 낭가사상의 국선·풍월도·풍류도의 기원을 한국상고사의 수두시대에 설정하고 그 의미 또한 중국의 것과는 분명히 다르다고 구별하였다. 이렇듯 신채호는 그의 민족사학의 변화과정과 사학정신의 바탕인 낭가사상 형성과정에서 대종교의 절대적 영향을 받은 것이다.

한편 박은식도 1910년 대종교를 경험하기 이전에는 유교적 중화사관에 바탕을 둔 유교사상에 대한 절대적 옹호로 일관했다. 그런 이유로 고대사 인식에서도 단군의 의미조차 거론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강역(疆域) 문제에서도 반도의 틀을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결국 1910년 이전의 그의 역사서술은 한마디로 안정복의 “동사강목”에 나타나는 역사인식보다 못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그가 1910년 경술국치를 계기로 대종교에 귀의하면서 국혼(國魂)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민족주의 사학자로 변신하게 된다. 1911년 만주 망명과 함께 대종교에 입교한 박은식은 그의 대표적 저술인 “대동고대사론”(大東古代史論)과 “몽배금태조”(夢拜金太祖)를 통해 민족과 역사의 공동운명 관계를 밝히면서 독립을 위한 민족주의 역사관을 고취했다.


먼저 전자에서는 역사와 더불어 종교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한국 종교의 조종(祖宗)을 단군으로 밝히고 현재의 대종교가 이를 계승한 역사적 종교임을 천명했다. 후자는 나라가 망한 데 대한 준엄한 자기비판이 통곡처럼 흐르고 앞으로 나라를 되찾으려는 결의가 천둥처럼 울려퍼지는 통렬한 독립지침서이자 유교정신을 탈피하려는 박은식 자신에 대한 사상과 의식이 가장 집중적으로 표현된 책이다.

박은식은 이 책의 저술 동기가 대종교의 절대적 영향임을 밝히면서 인간이 나라에 충성하고 민족을 사랑하는 자라면 그 육신의 고초는 잠시일 뿐이요, 영혼의 쾌락은 무궁한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 나라를 팔아먹고 민족에 화를 주는 자는 육체의 쾌락은 잠시일 뿐이요, 영혼의 고초는 무궁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어 그는 중화적(中華的) 가치 속에서 1천년을 흘러온 과거 노예의 역사를 통곡하면서 유교적 사대주의야말로 민족의 자존과 독립을 위해 반드시 청산해야 할 대상임을 밝혔다. 이렇듯 박은식의 정신주의사관의 배경에는 대종교라는 가치가 굳게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대종교와 연관된 인물들의 지극한 국어사랑의 정신 또한 대단했다. 먼저 ‘한글’이라는 명칭을 처음으로 사용하고 후일 ‘조선어학회’의 정신적 기둥이었던 주시경(周時經)은 배재학당을 졸업하면서 받은 예수교 세례를 과감히 버리고 대종교로 개종한다. 이러한 그의 대종교에 대한 능동적 선택은 당시 지식사회에 커다란 충격으로 던져졌다.
한마디로 그는 국어사랑의 바탕을 우리 민족정신의 뿌리인 단군신앙에서 찾고 언어민족주의를 몸소 실천하고자 했던 것이다. 또한 주시경 밑에서 한글 연구에 몰두했던 김두봉도 대종교의 핵심인물로 1916년 대종교 중광교조 홍암이 구월산에서 순명조천(殉命朝天)할 당시 홍암을 수행했던 6인 가운데 수석시자(首席侍者)였다..

한편 ‘조선어학회’를 사실상 이끌었던 이극로는 그가 가장 존경했다고 알려진 대종교 3세 교주 윤세복에게 감명받아 대종교에 입교한 인물이다. 그는 대종교에 입교하여 해방 후 월북하기 전까지 대종교의 주요 업무에 관여하면서 국어사랑운동을 실천했다. 앞에서 언급했던 대종교의 임오교변이 이극로의 ‘널리 펴는 글’에서 발단되었는데 ‘조선어학회사건’의 발단 또한 공교롭게도 이극로와 연관돼 있다. 즉, 윤세복이 만주 동경성에서 ‘단군성가(檀君聖歌)'를 작사하여 이극로에게 보내 작곡을 의뢰했다.

바로 이 가사가 어학회 사무실 이극로의 책상 위에서 발견되면서 조선어학회사건의 빌미가 된 것이다. 대종교의 임오교변과 조선어학회사건은 이러한 정황을 감안할 때 당시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의 최후 수단으로 우리 민족의 얼·말·글을 말살하기 위해 조직적으로 꾸민 일대사건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당시 어학회 핵심인물들의 상당수가 대종교 인물들로서, 대종교의 원로들이 조선어학회가 대종교의 국내 비밀결사조직 역할을 담당했다고 증언함을 볼 때 두 사건의 필연성을 더욱 뒷받침한다. 이밖에도 민족의 정적(情的) 측면에서 대종교의 중요성을 강조한 최현배(崔鉉培)나 대종교의 중심인물로서 한글사랑을 실천했던 정열모·정인보·안호상 등이 모두 대종교의 정신 속에서 우리 글을 갈고 닦는 데 앞장섰던 인물들이다.


끝으로 일제하 독립운동의 선봉에서 조국 광복을 위해 앞장섰던 대종교의 인물들 또한 화려하다. 먼저 상하이 임시정부의 산파역을 담당한 신규식은 대종교의 시교사 자격으로 중국으로 건너가 ‘한국민족의 부흥은 반드시 대종교가 발전하는 데 있다’는 신념 하에 박찬익·조성환· 유동열· 조완구·이상설 등 대종교의 중심인물들과 활발한 외교활동 및 독립운동 지원활동을 전개했다.
또한 만주 무장독립운동을 이끈 대표적 인물들로는 이동녕·현천묵· 계화· 윤정현·황학수· 김승학· 홍범도· 김혁· 김좌진· 윤복영·이범석· 여준· 이홍래· 정신·이동하· 한기욱 등이다. 실로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대종교인들이 무장독립운동의 지도자급으로 활동했다.

특히 무원 종사에 의해 주도된 ‘무오독립선언서’와 백포 종사가 총재로 대종교도들이 중심이 되어 뭉친 북로군정서의 ‘청산리독립전쟁’의 승리는 한국 독립운동사에 기념비적 사건으로 기록됐다. 또 상하이 임시정부의 국무위원급 이상으로 참여했던 대종교 인물들을 보더라도 이시영·박은식·이동녕·신규식· 이상룡·조완구· 박찬익·조성환 등을 망라하여 20여명을 헤아린다.
한편 대종교의 임오교변 당시 순교한 백산 안희제는 대종교 정신을 토대로 민족경제를 몸소 실천·운용함은 물론, 대종교의 발전에 헌신하면서도 상하이 임정 독립자금의 상당량을 비밀리에 헌납한 인물이다.

이밖에도 조소앙(趙素昻)이나 안재홍(安在鴻)·안호상 등은 대종교의 교의(敎義)인 홍익인간의 정신을 계승하여 삼균주의(三均主義)·신민족주의(新民族主義)· 한백성주의(一民主義) 등의 논리로 발전시킨 인물들로 꼽힌다. 해방 후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은 집권과정에서 정권의 정당성을 강화하기 위해 김구(金九) 선생을 제외한 대부분의 대종교 인사를 정부 요직에 끌어들였다. 건국내각에는 이시영 부통령을 비롯해 이범석(국무총리)·안호상(문교부장관)· 명제세(심계원장)· 정인보(감찰위원장)· 신성모(국방부장 관)씨 등 6명의 대종교인이 참가했다. 또 미군정 시절에는 안재홍 선생도 민정장관을 지내기도 했다.

그러나 당초 상하이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계승하여 민족의 주체성을 확립하고자 약속했던 이승만은 집권 후 오히려 대종교와 임정 세력을 제거하고 친일파를 등용하면서 권력지향적 마각을 드러내고 말았다. 그러나 대종교의 인사들이 건국운동에 참여하지 않았더라면 국가는 더 큰 소용돌이 속에 빠져들었을 것이 분명하다.



홍암 나철 대종사는 구한말 일제의 침략이 본격화하자 국운을 바로세우기 위해 동분서주했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나라를 팔아넘기려는 을사5적의 주살(誅殺)을 도모했지만 그마저 여의치 않았다.

그는 1909년 음력 정월 대보름날(1월15일) 대종교를 중광하기에 이르렀다. 대종교 중광과 더불어 항일 독립운동이 종단의 교운(敎運)을 건 급선의 실천과제로 뒤따랐다. 대종교의 항일정신은 중광 자체가 바로 항일독립운동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숙명적 과제였다. 항일정신은 바로 독립정신이며 나라를 구하고 동포를 건지려면 온겨레의 구심점을 국조 단군한배검으로 귀일시키는 것 이상의 명분이나 묘방묘책(妙方妙策)은 없었던 것이다. 대종교의 항일 독립정신은 이렇게 구체적으로 나타났다.

국조 숭배사상을 고취하며 홍익인간 이화세계(弘益人間 理化世界) 이념을 종단의 구현목표로 삼았다. 민족신앙의 교리(敎理) 안에 우리 민족사상과 민족철학이 담겨 있다는 사실을 홍보했다.

만주로 망명하여 적극적인 무력항쟁으로 전환, 독립전쟁을 수행했다. 그곳에서 신흥무관학교를 비롯한 독립군 양성소를 만들고 청산리전투를 비롯해 벽오동·대전자전투 등 수많은 독립전쟁을 주도했다.

단기 4251년(1918·戊午) 음력 10월 개천절에 무오독립선언(대한독립선언서)을 해외 독립운동 지도자 39인 명의로 선포했다. 무오독립선언은 무제한 무력투쟁을 선언한 데 비해 3·1독립선언은 평화적 항쟁을 선언했다는 데 차이가 있다.

포교활동은 독립운동으로 이어졌으며 독립운동은 곧 포교활동이었다. 따라서 만주에서 40여곳의 교당(敎堂)은 독립운동 기지화했다.

국가와 민족의 장래를 설계하기 위한 민족교육학교를 설립했다. 이로써 신흥학교·동창학교·배달학교 등의 배움터가 만들어졌다.

무력항쟁과 문화항쟁 양면작전으로 교육 및 문화운동을 전개해 만주에서의 민족학교, 국내에서의 교육계 중진을 배출했고 한글(언어)창달 운동을 벌였다. 일제의 언어말살정책에 맞서 조선어학회 조직 및 한글큰사전 편찬활동을 벌였다.

대종교의 항일 독립운동은 포교활동과 독립항쟁, 민족교육이 삼위일체(三位一體)를 이루었다.

독립군 및 임시정부에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했다.

국내에서 비밀결사를 통해 문화운동을 벌였다. (교육자·국학자 및 각계 저명인사 포섭)

임오교변(壬午敎變)과 조선어학회사건:단기 4275년(1942)에 일제가 두가지 정책사건을 동시에 일으켰다. 조선어 말살정책으로 조선어학회 사건을, 조선민족정신 및 항일운동 핵심체 말살정책으로 임오교변을 일으켰다. 이때 10명의 대종교 지도자가 순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