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한옛날 우리 배달민족은 백두산(白頭山) 남북을 중심으로 하여 풀옷[草衣]을 입고 나무열매를 먹으며 둥이[巢]와 구멍[穴]에 거처하는 원시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때 한배검[天祖]께서는 홍익인간(弘益人間)과 광명이세(光明理世)의 이념을 가지시고 상원갑자(上元甲子) 시월 초사흘날 백두산에 내리시어 교화(敎化)를 펴기 시작하시니 이날이 곧 개천절(開天節)이다.

이로부터 125년 뒤인 무진(戊辰) 같은 시월 초흘날 교화에 젖은 백성들의 추대(推戴)를 받으시어 임금이 되시니 이분이 곧 단군(檀君)이시오, 이 해가 바로 단군기원(檀君紀元) 첫해이다.
그때의 정사(政事)로서는 곡식[穀]·명령[命]·질병[病]·형벌[刑]·선악(善惡)의 다섯 가지 일을 주관하시고 다시 이를 삼백육십사(三百六十事)로 나누어 다스리시니 남녀(男女)·부자(父子)·군신(君臣)의 윤리(倫理)와 의복·거처·음식의 모든 제도가 비로소 잡히어 문화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때 나라 지경은 동으로 창해(滄海), 서로 흥안령(興安嶺), 남으로 영해(瀛海), 북으로 흑수(黑水)에 이르니 그 길이 실로 만여 리였다.

이어 비서갑(匪西岬·만주) 땅에서 신후(神后)를 맞이하여 백성들에게 누에치기와 길쌈하는 기술을 가르치게 하시고, 태자 부루(夫婁)로 하여금 질그릇[陶器]을 만들도록 명하시어 민생(民生)을 후하게 하시고, 황자 부소(夫蘇)는 의약(醫藥)을 맡아 병을 다스리게 하시고, 황자 부우(夫虞)는 사냥[狩獵]을 맡아 사나운 짐승의 해를 덜게 하시고, 황자(皇子) 부여(夫餘)는 잔치하는 예절을 맡아 민속을 숭상케 하시며, 또 이 세 황자로 하여금 혈구(穴口·강화도)의 정족산(鼎足山)에 성을 쌓아 국방(國防)을 굳게 하시었으니 지금도 이 산성의 옛 자취가 단군 한배검의 성덕을 찬미하는 듯하다.

또 원보 팽우(元輔彭虞)로 하여금 산과 물을 다스리게 하시고, 사관 신지(史官神誌)로 글과 문서를 맡게 하시고, 농관 고시(農官高矢)로 농사짓는 일을 가르치게 하시고, 악관 지제(樂官持提)로 노래와 춤을 가르치게 하시고, 군장 여수기(君長余守己)와 상장 배천성(上長裵天生)으로 산업을 권장하게 하시어 백성들의 살림을 불어나게 하시니 아래로 안팎의 도움이 어질고 위로 임금님의 공덕이 널리 퍼지어 실로 인간을 홍익(弘益)하게 하신 광명천국(光明天國)을 이룩하시었다.

원래 우리 배달민족은 지역적으로 아시아 동쪽에서 백두산의 광명한 정기를 타고난 밝고 어진 민족인지라 원시시대에는 밝음을 상징하는 태양을 숭배하여 오다가 단군 한배검께서 천신대도(天神大道)로 교문(敎門)을 열으시고 교화(敎化)를 펴게 되시니 이로부터 한얼님을 받드는 사상이 점차로 깊이 뿌리 박혀졌었다.

그리하여 그 뒤 역대에 따라 이 신교(神敎)의 명칭이 달라졌으니 부여(夫餘)에서는 대천교(代天敎), 신라는 숭천교(崇天敎), 고구려는 경천교(敬天敎), 발해(渤海)는 진종교(眞倧敎), 고려는 왕검교(王儉敎), 만주(滿洲)에서는 주신교(主神敎)라 하였고 다른 나라에서는 천신교(天神敎)라 불러 왔다.


한배검께서 임금 자리에 오르시기 전부터 백여 년 동안 백두산을 중심으로 아시아 동방에 교화를 널리 펴시니 백두산 남북에 흩어져 살던 삼천단부(三千團部)의 백성들은 다 이에 젖어 한얼님을 받들고 조상을 숭배하며 사람을 사랑하는 어진 덕이 두터워 이웃 나라에서는 예의 군자의 나라[禮儀君子之國]라 칭송하였고, 또한 김을 기르고 성품을 단련[養氣練性]하는 선술(仙術)이 발달되어 중국으 방사(方士·신선공부하는 사람)들이 많이 연구하러 왔으며, 또는 신교계(神敎系)의 신비를 찾으려고 온 이들도 많았으니 이들은 한배검 교화에 관계된 여러 영적(靈蹟)을 받들며 신지비사(神誌秘詞)에 대한 예언(豫言)과 장생법(長生法)을 전수(專修)하여 자기 나라에 많이 전했다.

이로부터 연·제(燕齊)의 방사를 비롯하여 삼신(三神)의 신비한 지역으로 사모하는 제왕(帝王)들도 있었으며, 또한 진한(辰韓)의 문박씨(文朴氏)는 구월산(九月山)에서 이 비법을 수행한 뒤 이 법이 신라와 고려를 거쳐 조선까지 전승하여 소요(逍遙)하게 산수(山水)에서 노는 이도 있게 되고, 예언과 신비로 소침(銷沈)한 민심을 희망과 활기를 띠게 한 이도 있으니 곧 신라의 최치원(崔致遠)·김유신(金庾信)·난랑(鸞郞)·영랑(永郞)과 고려의 강감찬(姜邯贊)·묘청(妙淸)과 조선의 김시습(金時習)·전우치(田禹致)·이지함(李之函) 같은 이들인 바 대도 교화의 현묘한 성능이 오히려 이 방면에 갖추어진 느낌이 없지 않다.

또한 한배검께서는 임금이 되신 뒤 태자 부루(夫婁)를 도산(塗山)에 보내시어 하우(夏禹)와 만나 나라 지경을 감정(勘定)하게 하시고 오행치수법(五行治水法)을 전하게 하시니 실로 그 교화의 밝음이 이웃 나라에까지 미친지라 덕화가 망방에 젖게 되어 때에 사람들은 죄짓기를 두려워하고 한얼님께 빌기를 일삼아 오더니, 그 뒤 천여 년이 지나 석가(釋迦)는 자비(慈悲)로써 선덕을 쌓아 내세극락(來世極樂)의 법을 주장하고, 노자(老子)는 무위(無爲)로써 자연에 방임하는 현덕(玄德)을 주장하고, 공자(孔子)는 인덕(仁德)으로써 치평(治平)의 도를 주장하여 여러 민족의 도덕과 문화를 빛내어 왔으니 우리 신교(神敎)의 문화가 오히려 이 세 부문에서 넓게 나타난 것이다.

또한 고구려의 선인(仙人)과 신라의 화랑(花郞)은 이 신교의 연원(淵源)과 대도의 교화를 이어받아 그 정신을 높이고 나라를 지키며 정치와 문화를 숭상하여 배달의 얼을 지녀 왔으나 한배검 교화의 성덕이 자못 컸음을 이제 알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한얼님을 숭배하여 온 까닭에 한얼께 제사함을 유일한 의식으로 알고 행하여 왔다.
이에 한배검께서는 우리 인간의 사회생활이 안정되었음을 매우 기뻐하시고 강화 마니산(江華摩尼山)에 참성단(塹城壇)을 돌로 쌓으시고 한얼께 제사드리어 근본 갚는[報本] 대의를 밝히시고 해마다 시월 개천절에 의식을 받들어 전케 하시니 천파만류(千派萬流)로 퍼져 가는 자손들이 반만 년 동안 이를 준행(遵行)하여 왔다.

역대적(歷代的)으로 이 제천행사가 거행되어 옴에 나라마다 그 이름이 다르니 부여에서는 영고(迎鼓)라, 예(濊)와 맥(貊)은 무천(舞天)이라, 진한(辰韓)과 변한(弁韓)은 계음(?飮)이라, 마한(馬韓)은 소도(蘇塗)라, 고구려는 동맹(東盟)이라, 신라에서는 구서(九誓)라, 백제는 교천(郊天)에 나라 안 사람이 모여 여러 날 동안 음악과 노래와 춤으로 즐기고, 특히 마한의 소도(수두)놀이에는 깨끗한 곳에 큰 나무를 세우고 그 나무에 큰 북을 달고 울리며 그 대회(大會) 중에서 한 사람을 뽑아 천제(天祭)를 주관케 하고 그 이름을 천군(天君)이라 불렀다.

이밖에도 구월산 삼성사(三聖詞)과 평양(平壤)에 있는 숭령전(崇靈殿)과 만주에 있는 영주 목엽산(永州木葉山)의 사당(祠堂)은 역대 임금들이 친히 그 제사를 받들고 의식의 엄숙함은 물론이요, 여러 가지 행사로 즐겨 온 사실이 이웃 나라 역사에까지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한울을 공경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사상이 깊으므로 이에 대한 아름다운 풍속을 잘 지켜 왔다. 오늘에도 시골 각 지방에는 이 뜻을 잘 알지 못하고 행하는 이도 적지 않으나 한배검 교화의 덕풍(德風)이 반만 년 동안 길이 전해옴은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제 남아 있는 몇 가지의 민속을 적어보면 아래와 같다.

고갯길 나무 아래에 돌대를 쌓고 신을 위하는 곳을 성황당(城隍堂)이라 하는 바 이는 단군님의 신하로 산과 물을 맡아 다스린 팽우(彭虞)님의 공적을 추모하는 풍속이다.

어린 아기를 낳으면 문에 검줄[신삭(神索)·새끼줄]을 매며 삼신(三神)께 고하고 헝겊이나 붉은 실을 머리 끝에 매어주고 아기의 명복(命福)을 비는 것은 조화(造化)·교화(敎化)·치화(治化)의 삼신일체(三神一體) 상제(上帝)이신 한배검께 원을 비는 것으로 이 헝겊을 단군 한배검께 빈다 하여 그 이름을 단기(檀祈·댕기)라 한다.

남녀와 노소를 막론하고 저고리의 동정은 반드시 흰 빛으로 하나니 이것은 한배검께서 백두산에 내리셨다 하여 그 빛을 흰 것으로 하고 또한 동정은 산 높이와 같이 저고리의 제일 높은 것에 있기 때문이다.

집집마다 시월에 고사를 지냄은 한배검께서 시월(상달)에 백두산에 내려오시고 또 임금이 되신 그 덕을 우리러 받드는 것이나 오늘은 거의가 이 뜻을 알지 못하고 지신(地神)을 위하는 행사인 줄로 알고 있다.

농부들이 밭에 나가 일하다가 음식 먹을 제 반드시 첫 숟가락을 뜬 밥을 내던지며 고시례(고시네)하는 것은 단군님 때에 농사 일을 맡은 고시(高矢)를 추모하는 풍속이다.

단지 속에 깨끗한 헝겊과 쌀을 담아 방 한 구석에 달아매고 이를 재신(財神)이라 하고 그 이름을 부루단지라 한다. 이는 단군님의 맏아드님이신 태자 부루(夫婁)를 추모하는 민속이다.


중광이란 대종교(大倧敎)가 다시 일어나 거듭 빛났다는 뜻이니 위에 적은 바와 같이 신교(神敎)는 여러 천 년 동안 우리 민족의 한얼을 받드는 정신이 짙어서 한갓 국교(國敎)로 내려오다가 고려(高麗) 원종(元宗) 임금 때에 원(元) 나라의 침입으로 국권은 빼앗기고 점점 억눌리게 되어 마침내 교문이 닫히고 말았다.

그 뒤 고려의 반세기(半世紀)와 조선(朝鮮)의 오백 년 동안을 합쳐 무릇 칠백 년 가까이 교문을 다시 열지 못하고 있던 중 한국말엽(韓國末葉)에 기울어져 가는 국운을 일으키려고 몸과 목숨을 바쳐 오시던 홍암(弘巖) 나철신형(羅喆神兄)은 일본의 앞잡이인 이완용(李完用) 등 무리를 쳐 없애려다가 그 뜻을 펴지 못하고 지도(智島)에서 귀양살이를 하던 차 천행(天幸)으로 고종황제(高宗皇帝)의 특사(特赦)를 받아 돌아온 뒤 다시 나라를 구하려는 높은 뜻으로 일본에 교섭하러 갔다가 천만 뜻밖에 백두산에서 십 년 수도하고 한배검의 묵시(默示)를 받아 보본단(報本壇) 돌집 속에 감추었던 [삼일신고(三一神誥)]를 찾으시고 신교(神敎)의 중광(重光)을 위하시어 몸 바친 백봉신사(白峯神師)님의 전하는 계명(誡命)을 받으시고 오로지 나라와 민족을 구하는 길은 정치적 운동보다도 한배검께 정성을 바쳐 신화(神化)의 큰 힘으로 일으킴이 마땅하리라 생각하고 이어 돌아와 일 년 원도(願禱)를 계속하고 마침내 한배님의 묵시(默示)를 얻어 기유(己酉)년(서기 1909) 음력 정월 보름날에 서울 재동(齋洞) 취운정(翠雲亭) 아래에서 한얼님께 제사를 올리고 포명서(布明書)를 선포하고 교문을 열으시어 교우(敎友)들의 추대로 교주(敎主)가 되시니 이날이 곧 대종교가 세상에 다시 일어나 거듭 빛난 중광절(重光節)인 것이다.

홍암신형(弘巖神兄)은 이어 본교(本敎)의 대의인 오대종지(五大宗旨)와 교규(敎規)를 반포(頒布)하고 선도포교(宣道布敎)에 전력을 다하시어 국내 각처에 교당이 세워지고 교우들의 수가 날로 늘어감에 일본은 그 세력을 두려워 이에 탄압을 가하기 시작했다.

본교는 할 수 없이 구내 포교를 단념하고 서기 1914년 갑인(甲寅)년에 그 본사(本司)를 백두산 기슭 청파호(靑坡湖)에 옮기고 비밀히 교화운동을 계속하여 오던 중 서기 1916년에 일본은 새로운 법령을 만들고 대종교를 말살하기 위하여 종교단체의 등록을 거부하고 포교에 대한 억압이 날로 심하매 교주 홍암신형은 마음에 뜻한 바 있어 그 해 팔월 보름날에 황해도 황해도 구월산 삼성사(三聖詞)의 봉심(奉審)을 최후로 그곳에서 많은 유서(遺書)를 남기고 폐기법(閉氣法)으로 순교(殉敎)하시었으니 이날을 본교에서 가경절(嘉慶節)이라 한다.

오대종지와 유서 일부를 소개한다.


- 공경으로 한얼님을 받들 것[敬奉天神]
- 정성으로 신령한 성품을 닦을 것[誠修靈性]
- 사랑으로 겨레와 종족을 합할 것[愛合種族]
- 고요함으로 이익과 행복을 구할 것[靜求利福]
- 부지런으로 산업에 힘쓸 것[勤務産業]


순명삼조(殉命三條)

1. 나는 죄가 무겁고 덕이 엷어서 능히 한배님의 큰 도를 빛내지 못하며, 능히 한 겨레의 망케 됨을 건지지 못하고 도리어 오늘의 업신여김을 받는지라 이에 한 올의 목숨을 끊음은 대종교를 위하여 죽는 것이다.
一. 철(喆)은 죄악심중(罪惡深重)하고 재덕비천(才德菲薄)하여 불능보광 천조지대신(不能普光 天祖之大道)하며 불능홍제신족지서륜(不能弘濟神族之胥淪)하고 반치유금일지모욕(反致有今日之侮辱)일새 자결일루지명玆決一縷之命)하여 이순우종교자(以殉于倧敎者)로다.

1. 내가 교를 받든지 여덟 해에 빌고 원하는 대로 한얼님의 사랑과 도움을 여러 번 입어서 장차 뭇사람을 구원할 듯하더니 마침내 정성이 적어서 거룩하신 은혜를 만에 하나도 갚지 못할지라. 이에 한 올의 목숨을 끊음은 한배검을 위하여 죽는 것이다.
一. 철(喆)은 경봉팔재(敬奉八載)에 도첩영응(道輒靈應)하여 누몽신권신자(屢蒙神眷神慈) 묵계묵우(默契默祐)하여 약장부구중생(若將溥救衆生)이러니 이정성(而精誠)이 미천(微賤)하여 불능보답만일지은(不能報答萬一之恩)일새 자결일루지명(玆決一縷之命)하여 이순우천조자(以殉于天祖者)로다.

1. 내가 이제 온 천하에 많은 동포가 가달진 길에서 괴로움에 떨어지는 이들의 죄를 대신 받으리라 이에 한 올의 목숨을 끊음은 천하를 위하여 죽는 것이다.
一. 철(喆) 금대보천하동포형제자매(今代普天下同胞兄弟姉妹)의 미진항망(迷眞沆妄)하여 경추고암자지죄(竟墮苦暗者之罪) 자결일루지명(玆決一縷之命) 이순우천하자(以殉于天下者)로다.


아! 우리 종문(倧門)에 뒤를 이은 이들은 항상 공경하며 두려워하여 한우을 숭배하며 한얼님을 받들고 반드시 지극한 어짐과 사랑으로 사람을 건지고 세상을 구원하라. 이 교를 베풀어서 덕을 넓히고 업을 빛내며, 그 일의 처음을 좇아 벼리를 끌고 벼릿줄을 떨칠지어다. 마음을 놓아 신명(神明)을 속이지 말며, 기운에 지나쳐 선동하여 떠들지 말고, 빗나간 행동으로 정치에 간섭하지 말며, 망녕되이 움직여 법률에 범하지 말고, 겁냄과 원망을 품지 말며, 음탕함과 미혹함을 가까이 말고, 교문을 빙자하여 일을 저지르지 말며, 고우를 믿고, 세상 공론에 다투지 말고, 다른 교인을 별달리 보지 말며, 외국 사람을 따로 말하지 말고, 권세 있다고 아첨하지 말며, 궁하고 가난한 이를 업신여기지 말고, 안정함으로써 그 죄를 뉘우치며 근검으로써 뜻을 가지고 원도(願禱)로써 그 죄를 뉘우치며 근검으로써 살림을 불리고 자손에게 충성과 효도를 가르치며 형제끼리 화목하게 사랑하고 정밀하게 안으로 어짐과 지혜를 닦으며 삼가 밖으로 믿음과 정의로 사귀고 두터운 정성을 일으킴엔 반드시 내 집에 일찍이 있는 여덟 가지 금함[팔관(八關)]을 쓰며, 두터운 예절을 강구함엔 반드시 우리 도의 예부터 내려오던 아홉 가지 맹세[구서(九誓)]를 쓰고 세 법[삼법(三法)·지감(止感), 조식(調息), 금촉(禁觸)]을 힘써 행하여 먼저 욕심 물결의 고요히 쉼을 도모하며 한 뜻을 확실히 세워 스스로 깨닫는 문이 넓게 열림을 얻으라. 이와 같이 실천하면 한울이 반드시 복을 내릴 것이요, 만일 거슬려 어기면 한얼님이 반드시 재앙을 내리실 것이 조심하고 힘쓸지어다.


의아종문(?我倧門)에 사후제체(嗣後諸逮)은 상극경극외이배천사신(常克敬克畏而拜天事神)하고 필지인지자이제인구세(必至仁至慈而濟人救世)하라 시사교이보덕광업(施斯敎而普德光業)하며 준걸서이견망진기(遵厥緖而牽綱振紀)하라 물방심이사신명(勿放心而欺神明)하며 물격기이선소와(勿激氣而煽騷訛)하고 물횡행이섭정치(勿橫行而涉政治)하며 물망동이간법률(勿妄動而干法律)하고 물회공포원우(勿懷恐怖怨尤)하며 물근음사미혹(勿近淫邪迷惑)하고 물자교문이자사단(勿資敎門而滋事端)하며 물시교중이쟁세론(勿恃敎衆而爭世論)하고 물기시교외인(勿岐視敎外人)하며 물이론역외인(勿異論域外人)하고 물함미어권세(勿諂媚於權勢)하며 물능오어궁구(勿凌傲於窮?)하고 일이안정칙궁(一以安靖飭躬)하며 일이청직지조(一以淸直持操)하고 원도이회기죄(願禱以悔其罪)하며 근검이식기산(勤儉以殖其産) 교자제이충효(敎子弟以忠孝)하며 애형제이돈목(愛兄弟以敦睦)하고 정내수이인지(精內修以仁智)하며 근외교이신의(謹外交以信誼)하고 치독성(致篤誠)엔 필용오가증유지팔관(必用吾家曾有之八關)하며 강후례필용오도고래지구서(講厚禮必用吾道古來之九誓)하고 역행삼법(力行三法)하여 버번도욕랑지정식(法先圖慾浪之靜息)하며 확립일의(確立一意)하여 자득각문지활개(自得覺門之豁開)하라 여사실천(如斯實踐)이면 천필강복(天必降福)이요 약복패위(若復悖違)면 신필강화(神必降禍)리니 계지면지(戒之勉之)어다.


제1세 교주이신 홍암 신형이 순교하신 뒤 무원 김헌(茂園金獻) 종사(宗師)께서 그 도통(道統)을 이어받아 제2세 교주의 자리에 올랐다.
무원 종사는 이어 만중서 교의회(敎議會)를 소집하고 각지의 교구(敎區)를 정하며 교당의 설치와 육영사업(育英事業)을 비롯하여 청년운동에 전심하는 한편 저술(著述)과 간행(刊行)에 대한 일도 친히 맡아 보시어 한때 무려 사십만에 가까워 교세를 크게 확장시켰다.

그러나 좋은 일에는 마(魔)가 많이 생기는지라 이러할 즈음에 뜻밖에 비적(匪賊)의 난을 만나 교당은 불에 타고 교우들까지 생명의 피해를 입게 되니 무원 종사는 심화로 발병되어 교무(敎務)를 주관한 지 팔 년만에 쓸쓸히 만주에서 세상을 떠나버리고 말았다.

이에 앞서 우리 동포들은 나라 잃은 백성으로 조국에서 살길이 없어 만주로 망명하여 대종교를 받들고 한편으로 독립을 위한 광복운동에 앞장섰다. 그리하여 동북 만주에서 독립을 위하여 싸운 이는 거의 대종교인이요, 멀리 러시아와 중국 본토에까지 많은 동지들이 흩어져 있었다.
그러나 일본의 침략은 조국을 거쳐 만주에도 그 세력이 뻗어서 우리 교우가 적과 싸우다가 희생된 이는 십만을 헤아릴 정도였으니 일제의 간악함도 심하였거니와 우리 독립군의 애국애족심과 희생정신은 실로 거룩하다고 아니할 수 없다.

또한 백포 서일(白圃徐一) 종사는 천재적 기질을 타고난 분으로 교를 받든 지 십 년 동안에 군무(軍務)에 몸을 바치면서 교리를 밝히신 많은 저술(著述)을 세우셨다. 한때 교주의 영선(靈選)에 뽑히었으나 광복운동의 치병(治兵)을 약속한 바 있어 일시 유예(猶豫)를 얻어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의 총재(總裁)로 광복군을 지휘하다가 일본 토벌대(討伐隊)의 습격이 심하고 무기와 군량의 부족으로 임시군대를 해산하고 만주 밀산(密山)에 옮겨 있다가 토비(土匪)의 난을 만나 청년 사병이 많이 사상한지라 이 참변을 당한 종사는 너무나 통분한 나머지 광복운동의 장래도 암담하고 민족의 전도(前途)도 막연하기에 나라 없는 백성으로 사는 것보다 차라리 이 세상을 떠남이 마땅하다 생각하시고 41세를 최후로 밀산 송림(松林) 사이에서 그 목숨을 끊으시니 본교의 두 분 조사의 돌아가심과 아울러 3대 불행이었다.

제2세 교주 무원종사의 뒤를 이어 제3세 교주로 승임(陞任)한 분이 단애 윤세복(檀崖尹世復) 종사이다. 이때는 만주에서도 일본의 세력이 팽창(膨脹)하여 포교활동이 자유롭지 못한데다가 지난 날의 수난 흔적이 채 없어지기도 전에 일본은 중국정부를 위협하여 본교의 포교 금지령을 내리게 했다. 이에 종사는 만주에서 각 방면으로 해금운동을 하여 보았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마침 상해 임시정부의 외교를 담당하고 있던 남파 박찬익(南坡朴贊翊) 도형(道兄)에게 해금교섭을 위임하여 중국 정부에 청원한 지 일 년이 못 되어 그 목적을 달성했다. 그러나 뜻하지 않은 소위 만주사변(滿洲事變)이 일어나 동양의 대세는 갑자기 변하고 본교의 해금령(解禁令)도 그 실효(實效)를 보지 못하게 되었다.

이에 단애종사는 하는 수 없이 밀산 교우 집에 은피(隱避)하여 6년 동안 두문불출(杜門不出)하다가 위험을 무릅쓰고 하르빈(哈爾濱)으로 나오 교우 동지들고 함께 일본 영사관(領事館)의 양해를 얻어 그곳에 선도회(宣道會)를 조직하고 포교활동을 하다가 이로서 만족됨이 없어 발해(渤海)의 옛 서울인 동경성(東京城)으로 옮겨 총본사(總本司)를 설치하고 한편 대종학원(大倧學院)을 부설하여 포교으 할동을 펴고 궁궐터에 천진전(天眞殿)을 건립할 계획을 세우고 있을 무렵 간악한 일정(日政)이 어찌 이를 용인할 것이랴. 드디어 서기 1941년 임오(壬午) 11월에 교주 이하 간부 20여 명이 목단강 경무청 구금되니 이를 본교에서 임오교변(壬午敎變)이라 한다.

그동안으 고문과 악형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마침내 국체변혁(國體變革)이라는 죄명을 씌워 교주는 무기징역(無期懲役)에 다른 간부들은 최하 7년에서 최고 15년의 형언도(刑言渡)를 받고, 그 중 열 분은 악형에 못이겨 혹은 감옥에서 혹은 병으로 보석되어 자택에서 순교하였으니 이를 순교십현(殉敎十賢)이라 한다.
또한 교주 이하 간부들은 3년간 목단강 액하(掖河) 감옥에서 복역중 한배검의 도움으로 해방을 만나 출옥되었다.

이제 당시의 기소역문(起訴譯文)을 적어 둔다.


기소장(起訴狀)
좌기(左記) 피고(被告)사건에 대하여 공소(公訴)를 제기하오며 귀원(貴院)의 공판 수속에 의한 심판(審判)을 하시옵기 자(玆)에 공소를 제기함.
강덕(康德) 11년 2월 19일
목단강고등검찰청(牧丹江高等檢察廳)
검찰관(檢察官) 나까무라 요시오(中村義夫)
목단강고등법원(牧丹江高等法院) 어중(御中)

치안유지법위반(대종교 관계)
윤세복(尹世復), 김영숙(金永肅), 윤정현(尹珽鉉), 오근태(吳根泰), 이용태(李容兌), 최관(崔冠), 나정문(羅正紋), 이현익(李顯翼), 이재유(李在)


대종교(大倧敎)는 그 전 이름을 단군교(檀君敎)라 칭하고 명치(明治)42년 음 정월 15일 조선 경성부(京城府)에서 나철(羅喆)이 자고(自古)로 조선민족간의 신앙에 있어서, 조선민족의 시조이며 국조(國祖)라고 전승하여 단군(檀君)을 숭봉하며 이에 귀일(歸一)함으로써 조선민족 정신으 순화통일(醇化統一)과 조선민족 의식의 앙양을 도모함과 동시에 조선민족 결합의 강화에 의하여 독립국가로서 조선의 존속(存續)을 목표로 하고, 다수 동지와 함께 결성하여 스스로 제1세 교주(敎主)라고 한 단체로서, 그 교리(敎理)라는 것은 유일무이(唯一無二)의 천신(天神)이 우주만물을 창조하고 다시 지금(강덕 10년)으로부터 사천사백 년 전 태고에 천신이 인간으로 화하여 만선국경(滿鮮國境) 백두산(白頭山)에 강하한 이래 125년간 만선(滿鮮)에 널려 있는 삼천단부(三千團部)의 부민(部民)을 교화시킨 후 배달국(倍達國)을 수립하고 그 나라 임금 단군(檀君)이 될새, 그 영역(領域)은 동 창해(滄海·일본해), 서 사막(沙漠·흥안총성), 남 영해(瀛海·동지나해), 북 흑수(黑水·흑룡강)에 이르렀으며 93년간 인민을 통치한 후 승천하였고, 또 단군은 오훈(五訓)으로써 인민을 가르치며 곡(穀)·명(命)·병(病)·형(刑)·선악(善惡)의 오사(五事)로써 인민을 다스려서 질서 있고 또 평화로운 이상국가를 실현하므로 인민은 천신을 숭경(崇敬)하며 단군에 열복(悅服)하여 안락평온의 생활을 하여 왔으므로 그 후예들이 조선민족이라면 단군은 조선민족의 시조이며 국조이며 또 교조(敎祖)이라 하여 단군의 소위 오훈(五訓)은 천훈(天訓)·신훈(神訓)·천궁훈(天宮訓)·세계훈(世界訓)·진리훈(眞理訓)으로 이루었으며 진리훈에는 인물이 신(神)의 창조로 성(性)·명(命)·정(精) 삼진(三眞)을 받았고 또 한 번 지상(地上)에 태어날 제 심(心)·기(氣)·신(身) 삼망(三妄)을 얻어서 감(感)·식(息)·촉(觸) 삼도(三途)를 짓게 되므로 이것을 지(止)·조(調)·금(禁) 삼법(三法)으로써 수양하면 삼진(三眞)에 귀일(歸一)하여 신(神)에 화함을 얻는다고 하며, 또 단군교도 실천강령(實踐綱領)이라고 하여 오대종지(五大宗旨) 경봉천신(敬奉天神)·성수영성(誠修靈性)·애합종족(愛合種族)·정구이복(靜求利福)·근무산업(勤務産業)을 만들어서 조선민족은 단군을 신앙하여 신으로부터 받은 삼진(三眞)의 영성(靈性)을 닦아서 신에 화하도록 힘쓰는 동시에 이상국가인 배달국을 지상에 재건할 것이라고 하여 오던 중 동43년 7월에 나철은 단군교를 대종교(大倧敎)라 개칭하고 그 후 동년 8월 한일합병(韓日合倂)으로 조선민족이 독립국가를 상실함에 따라 대종교는 단군을 신앙함으로부터 조선민족 정신을 배양하며 조선민족의 결합을 도모하고 조선독립 의식을 앙양하며, 따라서 조선독립의 소지(素地)를 만들어 궁극(窮極)에서 조선으로 하여금 일본제국 통치권의 지배를 이탈시켜 독립국으로 하고, 또 그 독립형태를 이상국가인 배달국의 지상에 재건을 목적으로 한 단체이었으며, 제1세 교주 나철은 대정(大正) 5년 음 8월 15일 조선에서 사망하고, 그 후계자 제2세 김헌(金獻)은 동만총성영안현(東滿總省寧安縣)에서 사망한 후 윤세복(尹世復)이 동인(同人)의 유명(遺命)에 의하여 제3세 교주로 되었으며, 아국(我國·만주) 건국 후 동교의 소위 배달국 재건에 대한 조선민족의 독립은 배달구의 영역을 영토로 하고 따라서 아제국(我帝國)의 영토 전부를 탈취하며, 또 일덕일심(一德一心)의 기조상(基調上)에 처한 대일본제국 영토의 일부인 조선으로 하여금 동국의 통치권에서 이탈시켜 독립국으로 할 것을 목적으로 한 단체로 되어 있는 것이다.


신화의 은총(恩寵)으로 면방(免放)된 단애종사는 동경성(東京城) 본사로 돌아와 자유로운 천지에서 포교에 전임하고 있던 중 소련군이 점령한 만주 전역은 치안이 확보되지 못하고 행정의 체계마저 혼란을 이루게 되니 실로 무법천지(無法天地)요 무질서한 사회였다. 더욱이 소련군의 약탈하는 행패에 주민들은 공포에 떨고 또한 연안(延安) 공산군(共産軍)이 진주한 후로는 중국 중앙군(中央軍)과의 교전(交戰)이 날로 심하여 안도감을 가질 수 없었다.

이때 본교도 지방자치군에게 건물까지 강제로 점령당하고 적화공작(赤化工作)의 협조에 위협을 받게 됨에 일제(日帝) 때와 다름없는 박해가 다가오고 있었다. 사세(事勢)가 이에 이르자 종사는 46년간 갖은 파탄 속에서 포교의 무대(舞臺)로 삼아오던 한배검의 옛 강토인 만주에서 지난날의 회포도 사라지기 전에 다시 새로운 근심이 생기자 모든 일에 미진함도 있으려니와 해방된 조국의 사정이 더욱 궁금하여 그 다음 해인 서기 1946년 병술(丙戌) 2월에 몇 사람으 수행원을 대동하고 그리운 조국으 품안에 안기니 이것이 홍암 신형께서 백두산 청파호에 총본사를 옮긴지 43년만에 환국한 것이다.